• 연혁 전반
  • 2000s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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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나라에 서양의 치과의학이 전래된 것은

중국에서 온 영국의사 合信(Hobson)이 약술한 5종의 의서가 최한기의 "明南樓文集"에 전재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과 에 구강외과 영역에 속하는 여러 질병의 원인과 수술법 및 유치맹출과 교환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, 다음은 처음으로 서양의학을 전한 미국의 선교사인 (Horace Newton Allen 1858~1932)과 1907년경에 서울에서 치과의학을 개설한 미국치과의사 데이비드 에드워드 한 (David Edward Hann)을 통하여 서양의 치과의학을 받아들인 경우이다.

의 보고서에는 "1885년 4월에서 만 1년 후인 1886년 4월 사이에 60케이스의 치아카리에스와 55케이스의 구내염과 15케이스의 발치와 그 밖의 악골절, 구순파열, 라눌라, 교합수술을 한 통계"가 있다. 또한 고종 12년 (1875년)의 운양호 사건에 의한 병자수호조약 (1876년)은 정치, 경제, 사회, 문화의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의학분야에도 대변혁을 일으키게 되었다. 일본인들에 의하여 인천 및 원산등 개항지와 서울에 병원의 설립을 보게 되면서 치과부설 혹은 사설치과의원의 개업 등으로 소개된다.

부산에서도 역시 일본사람인 井上土가 1920년 치과의원을 개설하였다.

이 때 井上의 나이는 22세이며 세번째로 개업하였으나 최고참인 과 두번째로 개업한 34세의 은 5년이나 10년은 앞질러 부산에 온 것으로 추정해 봄직하다. 어쨌든 1920년 당시의 부산 인구는 7~8만이며 치과의사는 7명이었다. 이 있었고 은 1924년 부산에서 개업하였고 도 부산에 와 있었다.

그리고, 에는 이란 입치사가 1919년 개업했다. 한국인으로는 해방 후 경상남도 치과의사회와 부산치과의사회의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가 1926년 부산에서 개업했다. 이에 앞서 은 1921년 시행한 제1회 치과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마산에서 개업하였고 울산 진주는 1926년 경성치과의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는 1930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 후 밀양에서 개업했다. 또한 울산 은 1922년 5월에 개업했고 남해 , 고성 등 입치사들은 치과의사보다 앞서서 치술원을 개업했다. (입치사는 입치영업자로서 3년마다 면허갱신)